동서양을 불문하고 오랜 시간 인류가 즐겨온 굴,
서양에선 정력제로 동양에선 지혈제로도 쓰여
굴을 이용한 것은 동서양을 통하여 그 역사가 깊은데, 기록상으로 유럽에서는 기원전 95년경 로마인인 세르기우스 오라타 (Sergius Orata)에 의하여 키우기 시작한 기록이 있고, 동양에서는 송나라 시대(420년경)에 대나무에 끼워서 생산을 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1670년경 히로시마에서 처음으로 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선사시대의 여러 패총에서 출토되는 굴 껍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사는 오래인듯이 보이나 기록상으로는 1454년 단종 2년 공물용으로 생산한 기록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굴은 우리나라 전 해안에 분포되어 생산되나, 옛부터 이름난 굴 산지는 함경북도의 황어포, 함경남도의 영흥만, 경상남도의 낙동강하구, 전라남도의 광양만, 해창만, 영산강하구, 황해도의 용호도, 평안북도의 압록강하구등 이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갯벌파괴 및 간척사업으로 인해 굴 규모의 축소및 수질 오염으로 인하여 지금은 청정해역인 통영 부근 및 여수 가막만에서 그 대부분이 생산되고 있다. 굴의 생산 기술이 투석식법에서 수하식법으로 일본에서는 1923년,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경에 개발되어 굴사업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이 굴을 섭취하기 시작한 것은 유사이전으로 보이나,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더 좋아하고 일찍부터 애용한 것 같다. 서양인은 굴을 정력제로 여겨서 'Eat oysters, love longer' (굴을 먹어라. 보다 오래 사랑하리라.)라 하여 미신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다. 이의 근거를 보면 굴에는 글리코겐과 미량영양소인 아연(Zn)이 많은데, 글리코겐은 에너지의 원천으로서, 아연은 정액중에도 다량 존재하여 성호르몬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활을 하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굴을 최음성 식품으로 간주하고 있다. 고대 유태인은 종교상의 타부로 굴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의 사찰에서도 마늘등은 수행에 방해가 되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볼 수 있다. 또한 정력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굴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수산물을 날것으로 먹는 습관이 없는데, 굴만은 예외적으로 날것을 즐겨 섭취하고 있다. 때문에 전체 수산물의 생산량에서 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다. 대작가인 발자크는 한번에 12타스 (1444개)의 굴을 먹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고, 독일의 명재상인 비스마르크는 175개를 먹어서 객석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화도 있다. 또한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 위테리아스는 굴을 좋아하여 한번에 1,000개의 굴을 먹는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라틴 시인 아우소니우스는 산톤쥬 지방에서 눈과 함께 굴을 상자에 담아 로마황제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줄리어스 시저가 대군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원정을 꾀한 이유중의 하나가 테임스강 하구에서 나는 굴의 깊은 맛에 매료된 때문이라고도 하고, 나폴레옹 1세는 전쟁터에서의 세끼식사때에도 사정이 허락되는 한 굴을 먹었다고 한다. 영국속담에는 성 제임스의 날 (St. James's Day)에 굴을 먹으면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동양에서는 굴을 호, 모려, 굴, 여합, 모합, 석화, 방, 운려(껍질 모양이 구름같이 생겼다 하여), 고분 등으로 불리웠다. 굴껍질을 여방 또는 호보라 하고, 굴알은 여황이라고도 한다. 굴의 이름을 서민층에서는 굴이라 하였고, 지식층에서는 모려와 석화로 널리 불렸다. 또한,중국에서는 굴을 호라고 널리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모려라고 널리 쓴다. 동양에서는 굴만을 단순히 먹는 식용뿐만 아니라 의학용으로도 이용했었다. 굴 껍질을 불에 구워 가루를 낸후 출혈이 있는 외상에 이것을 발라 지혈제로도 썻던것이다.
(동의보감에서 발췌)